jasu's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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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에 해당되는 글 66건
- 2015.06.14 살면서...
- 2015.06.06 귀찮음의 목적성
- 2015.05.31 남산 라이딩
- 2015.05.28 바람
- 2015.05.25 낙산사 그리고 죽도해수욕장
- 2015.05.17 헬륨 풍선이 내려놓은 추억
- 2015.05.13 존재의 영향력 2
- 2015.05.11 특수 머리 야외촬영
- 2015.05.09 가치있는 선택
- 2015.05.05 주바라기 해피홈 블루베리 농장봉사
- 2015.04.26 Acidfunk 룩북촬영 in 양평
- 2015.04.25 내일의 그늘
- 2015.04.18 봄들
- 2015.04.12 여백의 시간.
- 2015.04.11 꽃이야, 봄이야
- 2015.04.08 챙기지 않은 렌즈
- 2015.04.04 노년의 봄.
- 2015.04.04 현상과 본질
- 2015.04.03 진심의 상처.
- 2015.04.01 반응의 부재(不在).
- 2015.03.29 속초, 그리고 좋은 사람.
- 2015.03.27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
- 2015.03.22 옥상달
- 2015.03.15 해남 땅끝마을 - 바다의 배려
- 2015.03.15 작년에 헤어진 봄.
- 2015.03.14 내 맘 같지 않아.
- 2015.03.07 미생의 다리
- 2015.03.07 영흥면 목섬 갈매기
- 2015.03.01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 2015.03.01 세월의 흔적...
글
살면서...
살면서 사람들의 부추김에 휩쓸리지 않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힘도
노력이고 능력이다. 다만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은
결과에 만족할 수 있다는 믿음이 뿌리를 내려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러한 믿음조차 우리에겐 필요가 없다.
글
귀찮음의 목적성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그 사안이 확고부동한 진리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더는 그 사안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대부분은 이런 착각에서 비롯된다.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귀찮아지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귀찮다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글
남산 라이딩
라이딩에서의 평지는 경치를 보는 재미가 있지만, 업힐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과 뿌듯함이 있어서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내리막의 기대보다 오로지 오르막의 매력에 만족하는 삶, 그 길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삶은 재밌었을 테니까.
글
낙산사 그리고 죽도해수욕장
동생들과 함께 축복받은 날씨에 속초-낙산사-죽도해수욕장을 다녀왔다. 깨끗한 바다 동해는 자주 방문했지만, 이보다 깨끗한 하늘과 시원한 날씨는 처음 경험해 보는 것 같다.
낙산사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멋지지만 죽도해수욕장과 인구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죽도암에서 바라본 바다는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져 보는 것만으로 바다 향이 달곰하게 느껴진다. 그 길 사이사이에 보이는 바다가 참 아름답다. 죽도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죽도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가 2km 정도로 수심이 낮고 경사가 완만하여 서핑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맑은 날씨에 근처에 방문했다면 꼭 죽도암을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글
헬륨 풍선이 내려놓은 추억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힌다는 것은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가슴 아픈 일이다. 내가 그대를 잊지 않으면 손해인가. 그대가 나를 기억하면 다행인가. 이것도 욕심이라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다. 헬륨 풍선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하면 더 오르기 전에 손을 놓아라. 그러면 의식은 살아 훗날 추억으로 이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글
특수 머리 야외촬영
아는 동생의 특수 머리 야외 촬영을 도와주기 위해 서울숲에 들렀다. 아주 오래전에 와본 기억이 있는데, 내 기억은 세월에 묻혀 희미하고 그때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듯하다. 비가 올 거라 예상하지 못하여 콘셉트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아무쪼록 쓸모있는 몇 컷 건지기를….
글
가치있는 선택
살며 마주하는 선택에 있어서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가치를 주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인생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삶의 후회로 고착된다. 그대가 지금껏 무슨 짓을 하며 살았던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과거의 잘못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후회를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개척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 또한, 가치를 고민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주바라기 해피홈 블루베리 농장봉사
함께 하는 봉사모임(신나자)에서 장애인과 함께 가꾸고 있는 「주바라기 해피홈」 블루베리 농장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바라기 해피홈」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중증 지적 장애인을 주간 및 단기간 보호하며 장애인들의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생활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적 장애를 가졌지만, 일상생활 교육 및 사회적응 자활 프로그램을 통해서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정부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해야하기 때문에 현재는 지원을 받지 못하고 소규모로 운영하며 자원봉사의 도움을 받아서 근근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들은 손길을 내밀어 주면 좋겠다.
나눔을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블루베리샵 운영을 통해 생과일, 묘목, 비빔밥, 주스, 잼 등을 판매하며, 정원 가꾸기를 통해서 옥상, 텃밭, 베란다를 꾸며주기도 한다. 또한, 농장 체험 행사를 통해서 우리 모임처럼 단체로 잡초를 제거하거나 분갈이를 하며 일손을 도울 수도 있다.
주바라기 해피홈 홈페이지 : http://www.joyhome.or.kr
글
Acidfunk 룩북촬영 in 양평
아는 동생의 부탁으로 Acidfunk 룩북 스케치 촬영을 다녀왔다. 영상촬영을 메인으로 진행했고 사진작가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연출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촬영 장소는 양평에 있는 '데이지하우스'라는 자그마한 펜션에서 진행했다. 각각의 방들이 콘셉트에 따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은 지라 Acidfunk에서 의도한 느낌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나저나 내가 찍은 사진 중에 얼마나 많은 컷이 브랜드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몇 컷이라도 쓸모 있기를 바라며 좋은 경험을 제공해준 Acidfunk 디자이너 친구들과 영상, 사진, 모델 친구들, 그리고 보경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글
봄들
봄이면 숨길 수 없는 변화가 들꽃으로 피어난다. 들이 옷을 입으면 비로소 내 무관심이 집 밖을 나서는 것이다. 한 계절을 지나 이제 다시 사람을 믿어 보자는 마음이 고개를 들어 꽃망울을 맺는다. 화려함에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화려함이 보이더란다. 누구의 관심도 아닌 들꽃이 말이다.
글
여백의 시간.
나는 요즘 생활 속에서 더 많은 느낌을 사유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전거를 탈 때도, 새벽에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날 때도, 하다못해 장을 보는 시간마저도 나는 꿈을 꾼다. 필요한 만큼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엇을 향해 나는 숨을 쉬고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의 꿈은 누구도 훔쳐볼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나에게 무한한 안도감을 주는 숨겨진 공간이자 살아남을 시간이다. 때로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슬픔보다는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라서 나의 외로움은 슬픔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 슬픔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내 옆, 빈자의 몫이다.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차이만큼,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이다. 나는 누군가와 다르고 그들은 또 그들의 누군가와 다르게 살아간다. 무엇이 정답이라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과 다른 궤도에 진입한 사람을 보면, 다른 행성 사람인 양 철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내가 안인가 그들이 밖인가를….
글
꽃이야, 봄이야
나는 지하철에 오르면 좌석이 비어 있어도 잘 앉지 않는다. 물론 나보다도 더 간절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앉아서 하는 일을 선택한 내 삶에 대한 보상에 가깝다. 이런 내 마음을 알길 없는 아주머니들이 자리가 났으니 앉으라며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사양하지만 제발 앉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표정에서 읽힐 때는 마지못해 영혼 없이 앉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렵게 앉은자리가 아쉬워 내릴 곳을 지나칠 만한 용기도 미련도 없다. 이제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의 진실성을 점검하는 방법에는 '그 사람과 얼마나 오래도록 걷고 싶은가'로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포옹하고 싶은 사람,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 키스하고 싶은 사람은 바뀔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세상 끝까지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은 결국 하나일 수 있다는 가정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 좀 더 내용을 보태자면, 함께 걸으며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관계의 연결을 강하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도 불편하지 않은 사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감정이 없고 나에게 무례하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은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너무 편하다는 표현일 수 있으니 오해하지 말자.
나는 오늘 새벽 여의도 길을 9km 걸었다.
침묵에도 불편함이 없으니 새벽에는 이렇게 혼자 걸어도 좋다.
글
챙기지 않은 렌즈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삶은 곧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음산하고 서글프다. 그러나 기다림은 아직 희망이 있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나는 자전거를 탈 때면 항상 카메라를 가져간다. 마음이 가는 사진 한 장 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렌즈 하나 더 챙기지 못한 나를 탓한다. 좋은 프레임, 그에 걸맞은 빛이 내리는 순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사진에 담으려는 마음과 조금만 더 가면 이보다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실랑이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주 겪는 일이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를 스쳤던가. 되돌아보면 후회스러운 장면, 지나치면 잊힐 줄 알았던 일들이 잔상으로 남아 아쉬움을 준다. “그래 조금만 더 가보자. 태양이 대지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꼭 그 따뜻함을 담을 수 있을 거야” 인생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스름이 짙어오는 황혼녘이 아니면 인생이 그러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것 또한 우리네 인생이다. 어느 날 사진을 현상하고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다며 누군가 옆에서 속삭인다면, 적어도 챙기지 않은 렌즈 때문에 뒤늦은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글
노년의 봄.
살다 보면 어제와 다름없던 오늘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일상에서 벗어난 내 삶을 먼 들에서 되돌아보는 시간일 수도 있고, 타인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돌이켜보지 않고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보며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진짜배기 행복이라고, 내일의 봄은 또 왔고 어제의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글
현상과 본질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부엌 아궁이 모서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고 엄마는 내 옆에서 밥을 퍼담고 계셨다. 나는 문득 궁금증이 발동하여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른이 되면 이름 바꾸는 거예요?”
”아니 왜?”
“아니 어른 이름은 어른 같고요, 애들 이름은 애들 같아서요”
“^^ 그렇지 않아, 그냥 태어날 때 지어준 이름 그대로 어른이 되는 거야. 네 이름도 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도 똑같이 쓰는 거야”
“…”
난 더는 엄마와 대화를 잇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계속 의문만 맴돌았다. 정말 어른 이름은 어른 같고 애들 이름은 애들 같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이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와 같이 현상과의 분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파편화된 어릴 적 기억이지만 그때의 질문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어떤 경우엔 대다수 사람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것을 비판적 시각 또는 비관적인 사람으로 오인할 수 있어도 그러한 용기는 진보적 가치와 맞물려 이 사회를 발전시킨 동력 중에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에게 비관적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비꽈서 생각하는 버릇 때문이다. 그 버릇을 통해 나온 내용은 비관적일 때도 있고 낙관적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나의 비관적인 발언을 더 많이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간혹 억울하기도 하지만 핑계를 대거나 해명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나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구체적인 기억도 없어서 이런 생각 자체가 귀찮음을 숨기는 핑계일 수도 있다.
도자기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가마에 들어가기 전부터 정해놓지 않는다.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글
진심의 상처.
누군가 마음 아파할 것 같아 진심으로 위로한 것이 오히려 의심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을 때의 아픔은 크다. 어쩌면 오해할 수 있음을 이해했던 나의 위선이 연료가 되어 활활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눈치를 보지 않으면 오히려 누군가는 내 눈치를 보겠구나 싶은 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이 나이가 되면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서글퍼지기도 하고, 진심을 받아주기에는 이 친구들이 그동안 느낀 마음의 상처가 컸구나 싶은 게 안쓰럽기도 하다.
나는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그것을 시작한 의미와 취지를 살려 철학을 담아 가치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가 흔들릴 때 바로 잡아줄 척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밭고랑을 일굴 수 있다. 믿는 만큼 따를 것이고 원칙을 지키는 만큼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좋지 않은 경험은 선례를 만들고 현상을 일으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복잡함을 바로잡으려면 강제성을 부여하게 되고 세상은 예상치 못하게 그만큼 갑갑해진다. 우리는 그런 부당함 때문에 자유를 찾았던 게 아닌가.
나는 좋은 뜻으로 노력했고 진심으로 응원했으며, 마음으로 위로했다.
내 뜻과 다르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린 것 같아, 오늘은 그 아쉬움에 조용히 마음이 운다.
글
반응의 부재(不在).
말할 수 없는 사물이 가끔 대화를 거부할 때가 있다. 내가 사물을 통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망각하는 어느 시점에 휘몰아치는 경험이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따금 이런 경험을 한다. 물론 그 경험 자체는 원천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별반 다르지 않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바로 반응의 부재인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용기, 그것은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요구에 대한 거절과 존재에 대한 거부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더욱이 그것을 잘 분리하여 본인의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거절을 세련되게 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서로 불편한 관계로 치닫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회피하거나 내민 손을 외면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이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서운함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섰다는 이유만으로 필요 이상의 가혹한 고통이 따르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먼저 다가서는 용기 보다도 다가온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본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응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라면"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오로지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에서도 선택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예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에 가깝다. 지금 당신 앞에 받아들일 수 없도록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세련되게, 멋지게 거절하자. 그 고뇌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안의 윤리적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글
속초, 그리고 좋은 사람.
오늘의 여행은 속초다. 누군가 나에게 동서남북을 두고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래도 “동”을 택하겠다. 동쪽의 길 위에는 환희의 설렘이 있다. 동쪽 땅 끝나는 지점에서 느끼게 되는 그 환희를, 나는 언제나 동경한다.
오늘은 아는 동생이 속초에서 나와 동행해 주었다. 동생과 이야기하다가 좋은 사람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나는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기억이 없다. 문득, 내 안에서 정의한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을지 궁금하다. 좋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이어서 그 의미 자체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상대방이 이해하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일도 벌어지고, 대화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의 정의를 미리 합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생긴다.
착하거나 선한 사람을 우리는 흔히 “좋은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목적에 의해 스스로 손해를 자초하는 부류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는 정신적·사회적으로 강인한 사람이다. 물론 소개팅에서와같이 이성으로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도 우리는 단지 좋은 사람으로 타자화한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옆에 두어도 딱히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음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 좋은 사람 입장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 스스로 쓸모 있음을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을 안다. 그래서 좋은 사람보다 구체적인 바보, “착한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남의 시선에 나를 담아 타인에게 맞추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수시로 변하는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 느낌과 쾌감을 쫓다 보면 어느새, 내가 바라는 나는 사라지고 타인이 바라는 나만 남게 되어 대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할 수도 있다.
결국, 내 안에 좋은 사람의 모습은 “나에게 나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편적으로 좋은 사람은 찾을 수는 있어도 내가 바라는 좋은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내 안의 좋은 사람을 객관화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작부터 주관적인 바로 나였으니까.
동생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좋은 사람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나에게 좋은 사람인 나를 찾게 되면 대상이 없어도 혼자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덤으로 터득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게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동생은 그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 걸로….
글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은 어떤 느낌일까. 이동을 위해 필요한 교통수단쯤으로 생각한다면 EBS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여행을 대신하려는 것만큼 재미없는 생각이다. 더욱이 반환점을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이니 목적에도 맞지 않다. 이따금 목적과 가치를 혼동하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 산행을 왜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지날 때면, 서울 사람들에게 한강이 없었다면 그 공허함을 어디서 채웠을까 싶다. 매번 나와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며, 각자 인생의 한 지점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나 또한 그들의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는 생각에 막연한 신기함으로 다가온다.
목적이 아닌 가치에 무게를 두면 오르막이 있어도 맞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리고 눈이 쌓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길은 행위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삶도 같지 않을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이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된다.
나에게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 그것은 내 노력으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 잠시 스치는 바람을 공짜로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부터의 시작이다. 그 반환점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하루하루 볼에 스치는 파도가 애틋하다. 오늘도 좋은 것만 보고 느끼고 주워 삼키며 살아도 짧은 인생, 그 한 지점을 스쳐 지난다.
글
옥상달
옥상에 달이 떴다.
남들도 외롭다는 사실조차 위로가 되지 않을 때는 달을 봐.
나는 오늘, 바람에 흔들리는 달을 보았다.
글
해남 땅끝마을 - 바다의 배려
'왜 여기까지 왔니?'
해남에 왔으니 땅끝은 밟고 가겠노라고 쓰잘 데 없는 의무감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다. 해남 땅끝은 나에게 추억이 없는 자리다. 그만큼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내가 숨 쉬는 서울 하늘과 멀리 떨어진, 그야말로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땅끝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작을 알리는 바다의 관점일까 아니면, 뻗어 나가지 못하는 땅의 미련이 만들어 놓은 공허함일까.
나는 얼마 전에 애정을 가지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던 모임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없이 좋은 사람들과 더없이 즐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모임이었다. 내게 큰 의미를 두었던 모임이기도 했기에 한 달이 넘도록 고민하고 고민하며 나에게 되물었다.
'너 그냥 참고 지내면 안돼? 너에게 피해 주는 것은 없잖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좋은 사람들과 재밌게 지내면 그만이지!'
'세상의 모든 가치는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만들어 가는 거지. 이미 다른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더욱이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속에 나를 두고 싶지 않아'
큰 사회든 작은 사회든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선호하는 이데올로기가 양분화되는 것 같다.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며 선을 긋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두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라며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지양하고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두 집단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 그것은 모두 같으니까.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다쳐도 내 이런 지리멸렬한 성격은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닐수도 있지만 이 또한 배움이라면 나이를 먹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비관을 바탕으로 한 긍정일지라도 현재는 옳다고 생각하니, 나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리라.
'땅끝마을에 묻어둔 공허함, 그래도 아쉽다며 나를 따라 서울까지 왔네!'
'그래 땅끝의 의미는 시작을 알리는 바다의 배려다.'
글
작년에 헤어진 봄.
작년에 헤어진 봄을 다시 찾았다. 억지로라도 좀 더 일찍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됐다. 설 잠을 이기고 새벽 1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준비물을 챙겨 길을 떠났다. 새벽 기운이 시원하다. 나는 가끔 하루의 시작이 새벽이라는 것이 다행일 때가 있다. 새벽 공기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하면, 남몰래 반칙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뛴다. 내게 오늘은 그런 날이다. 내려가는 길, 그믐달이 동행했다. 산 뒤에 숨기도 하고 내 뒤에서 따라오다가도 하고, 어느새 앞서 가기도 했다.
‘해오름 보러 가는데 눈치 없이 너는 왜 따라오니?’
그래도 달이 좋다. 어렸을 때, 해와 달이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떠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한 듯 친구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어느날 보니 화해했다더라… 이게 어릴 적 내 기억에 잠든 사연이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넘어가니까 반대로 달은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질 거라 생각한 것이 착각임을 알았을 무렵, 그들이 서로 화해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상실감은 꽤 컸던 기억이다.
'그들은 원래 친하지 않았데...'
내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나는 어김없이 ‘저기 봐, 달이 이쁘다’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일출을 보려면 적어도 아침 6시 10분까지 도솔암 산책로 입구에 도착해야 했다. 휴게소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달린 덕분에 예상한 시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하지도 않은 해와 달이 화해했던 것처럼, 오늘은 그 마음 그대로 해와 달을 만났다. 봄을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온 내가 본 것이 아니라, 봄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그들과 도솔암에서 만난 것이다.
‘봄은 시작이 아닐지도 몰라. 겨우내 소복이 쌓이는 비료가 없으면 돋아나지 못할 계절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새벽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아침처럼,
지금 다가오는 봄이 좋아,
가슴이 뛰고 설렌다.
*도솔암 : 통일신라말 당대의 고승 화엄 조사 의상대사께서 창건한 천 년의 기도 도량. 전남 해남군 달마산 도솔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미황사의 열두 암자 중 하나이다. 도솔암에서 50m쯤 아래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인 용담이 있다.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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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같지 않아.
들이는 공간만큼을 포기하는 것, 그것은 나에게는 큰 비용이다. 이 녀석은 방 안에 들이는 물건이 그저 흥미로움이겠지만 그만큼의 공간을 내줘야 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며칠 전, 고양이 풀을 사다 키웠다. 방 안이 척박해 보이기도 하고, 이 녀석 반응도 궁금했다. 며칠 동안 설명서에 적힌 대로 나름의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이 녀석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냄새를 맡아 보라며 코앞까지 갔다 줘도 딴청이다. 다른 고양이는 이를 쑤시고 씹어 먹기도 하던데...
사람 관계도 가끔은 이렇게 엇박자다. 내 맘 같지 않을 때가 많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 생각과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세상에는 그런 묘약은 없다. 약간의 비용이 들더라도 속 시원히 이야기하고 스스로 그 결과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이야기도 전하지 못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에 미안하기도 하고, 다음 수습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서로의 마음도 애처롭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자연히 치유될 일이다. 그러나 내 잘못을 곱씹다 보면 그 시간은 참 더디기만 하다.
허전해도 어쩌랴, 없어서 힘들고, 있어도 외로운 것이 인간인걸....
거칠고 차가워진 한쪽 면을 매일 같이 용접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공간만 작아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배움이고 인생이라며 간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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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의 다리
방산대교 앞, 시흥 갯골 남북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다리가 있다. 시흥시의 캐치프레이즈인 ‘미래를 키우는 생명의 도시’의 첫 글자를 빌려 “미생의 다리”로 알려졌는데, 다리의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이름을 대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곳은 목섬에서 갈매기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리게 되었다. 출사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때 스쳐 지나갔던 다리가 보여 무작정 차를 세웠다. 서해안로를 따라 신천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방산대교를 만나게 되는데, 방산대교를 진입하기 전에 오른쪽 샛길로 내려가면 미생의 다리까지 걸어서 진입하는 길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 몰려다니거나 포인트라고 하는 장소에서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같은 장소, 같은 화각이라도 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을 전달 할 수 있다지만, 멋진 장소에서 멋들어진 사진을 담지 못한다고 해도 나만의 시각에서 내 이야기를 담는 게 좋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은 유행이나 이슈에 민감한 것 같다. 사진 촬영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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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면 목섬 갈매기
흔히 바다를 떠올리면 흰 모래사장과 푸른 하늘과 맞닿은 바다, 동해를 생각한다. 동해는 깨끗함과 바다 향이 있는 반면, 서해는 갯벌 냄새와 가공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있다. 환경은 다르지만, 서해에도 어김없이 갈매기가 있다. 바다 풍경과 더불어 한가로운 정서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옛시조에 갈매기가 많이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갈매기는 전 세계에 약 86종이 알려졌는데 우리나라에는 13종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텃새 갈매기는 황새목(도요목) 갈매깃과에 속하는 괭이갈매기다.
괭이갈매기는 몸길이 약 46cm, 날개 길이 34~39cm의 중형 갈매기로, 머리와 가슴·배는 흰색이고 날개와 등은 잿빛이다.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괭이갈매기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무리생활을 하는 것과 강한 귀소성이 영역을 중시하는 길고양이의 삶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턱시도 고양이가 괭이갈매기의 깃털을 핥고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사진을 찍다 보니 유난히 카메라를 의식하는 갈매기가 있다. 사진 몇 컷 찍게 해주면 새우깡을 주겠지 하는 표정으로 요리조리 자세를 취한다. 우리나라에서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한 해에 판매되는 새우깡은 몇 봉지나 될까, 또 팝콘과 새우깡 중에 어느 것이 더 맛있다고 할까, 허니버터칩에 대한 평가는 어떨지도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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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摩尼山]
헤이리에서 일정이 어긋나서 평소에 생각해두던 강화도 마니산(높이 472.1m)에 다녀왔다. 마니산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다. 지금도 이곳에서 개천절에는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된다고 한다.
나는 상방리 매표소에서 계단로(4.8㎞/소요시간 2시간)를 따라 참성단에 올랐다. 계단로는 높은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길이 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자주 이용하는 코스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가족 단위의 관광객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평소에 걷거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다음날 조금 고생할 수도 있겠다.
날씨가 따라주지 못하여 서해의 먼 지평선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한나절 천천히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식당에서 만난 녀석이 보나 자마 나에게 눈웃음을 친다. 꼬리를 보니 길고양이 같은데 식당에서 돌보는지 목줄에 화장실까지 있다. 사랑을 받는 녀석이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할 거 같기도 하다. 어쨌든 슬퍼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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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흔적...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주말의 아쉬움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일요일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가 헤이리에 있는 「고막원」 카페에 방문하기로 했다. 가서 책도 보고 사진도 찍을 요량으로 손님에게 방해되지 않는 오픈 시간에 맞춰서 방문했지만, 카페 사장님께서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사연이 궁금하여 물어보아도 그냥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남자 혼자 오픈 시간에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사장님 눈에는 불편한 업자로 비친 모양이다. 헤이리를 한 바퀴 돌며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주말인데도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 헤이리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