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봄.

Photography/Snapshot 2015. 4. 4. 17:00

살다 보면 어제와 다름없던 오늘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일상에서 벗어난 내 삶을 먼 들에서 되돌아보는 시간일 수도 있고, 타인의 삶을 몰래 들여다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돌이켜보지 않고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보며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진짜배기 행복이라고, 내일의 봄은 또 왔고 어제의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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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본질

Photography/Bicycle 2015. 4. 4. 16:30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부엌 아궁이 모서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고 엄마는 내 옆에서 밥을 퍼담고 계셨다. 나는 문득 궁금증이 발동하여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른이 되면 이름 바꾸는 거예요?”

”아니 왜?”

“아니 어른 이름은 어른 같고요, 애들 이름은 애들 같아서요”

“^^ 그렇지 않아, 그냥 태어날 때 지어준 이름 그대로 어른이 되는 거야. 네 이름도 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도 똑같이 쓰는 거야”

“…”


난 더는 엄마와 대화를 잇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계속 의문만 맴돌았다. 정말 어른 이름은 어른 같고 애들 이름은 애들 같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이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와 같이 현상과의 분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파편화된 어릴 적 기억이지만 그때의 질문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어떤 경우엔 대다수 사람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것을 비판적 시각 또는 비관적인 사람으로 오인할 수 있어도 그러한 용기는 진보적 가치와 맞물려 이 사회를 발전시킨 동력 중에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에게 비관적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비꽈서 생각하는 버릇 때문이다. 그 버릇을 통해 나온 내용은 비관적일 때도 있고 낙관적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나의 비관적인 발언을 더 많이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간혹 억울하기도 하지만 핑계를 대거나 해명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나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구체적인 기억도 없어서 이런 생각 자체가 귀찮음을 숨기는 핑계일 수도 있다.


도자기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가마에 들어가기 전부터 정해놓지 않는다.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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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의 상처.

Photography/Memorials 2015. 4. 3. 02:30

누군가 마음 아파할 것 같아 진심으로 위로한 것이 오히려 의심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을 때의 아픔은 크다. 어쩌면 오해할 수 있음을 이해했던 나의 위선이 연료가 되어 활활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눈치를 보지 않으면 오히려 누군가는 내 눈치를 보겠구나 싶은 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이 나이가 되면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서글퍼지기도 하고, 진심을 받아주기에는 이 친구들이 그동안 느낀 마음의 상처가 컸구나 싶은 게 안쓰럽기도 하다.


나는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그것을 시작한 의미와 취지를 살려 철학을 담아 가치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치가 흔들릴 때 바로 잡아줄 척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밭고랑을 일굴 수 있다. 믿는 만큼 따를 것이고 원칙을 지키는 만큼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좋지 않은 경험은 선례를 만들고 현상을 일으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복잡함을 바로잡으려면 강제성을 부여하게 되고 세상은 예상치 못하게 그만큼 갑갑해진다. 우리는 그런 부당함 때문에 자유를 찾았던 게 아닌가. 


나는 좋은 뜻으로 노력했고 진심으로 응원했으며, 마음으로 위로했다. 

내 뜻과 다르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린 것 같아, 오늘은 그 아쉬움에 조용히 마음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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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의 부재(不在).

Photography/Snapshot 2015. 4. 1. 17:30

말할 수 없는 사물이 가끔 대화를 거부할 때가 있다. 내가 사물을 통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망각하는 어느 시점에 휘몰아치는 경험이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따금 이런 경험을 한다. 물론 그 경험 자체는 원천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별반 다르지 않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바로 반응의 부재인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용기, 그것은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요구에 대한 거절과 존재에 대한 거부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더욱이 그것을 잘 분리하여 본인의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거절을 세련되게 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서로 불편한 관계로 치닫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회피하거나 내민 손을 외면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이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서운함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섰다는 이유만으로 필요 이상의 가혹한 고통이 따르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먼저 다가서는 용기 보다도 다가온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본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응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라면"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오로지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에서도 선택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예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에 가깝다. 지금 당신 앞에 받아들일 수 없도록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세련되게, 멋지게 거절하자. 그 고뇌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안의 윤리적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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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그리고 좋은 사람.

Photography/Space 2015. 3. 29. 14:00

오늘의 여행은 속초다. 누군가 나에게 동서남북을 두고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래도 “동”을 택하겠다. 동쪽의 길 위에는 환희의 설렘이 있다. 동쪽 땅 끝나는 지점에서 느끼게 되는 그 환희를, 나는 언제나 동경한다. 


오늘은 아는 동생이 속초에서 나와 동행해 주었다. 동생과 이야기하다가 좋은 사람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나는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기억이 없다. 문득, 내 안에서 정의한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을지 궁금하다. 좋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이어서 그 의미 자체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상대방이 이해하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일도 벌어지고, 대화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의 정의를 미리 합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생긴다.


착하거나 선한 사람을 우리는 흔히 “좋은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목적에 의해 스스로 손해를 자초하는 부류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는 정신적·사회적으로 강인한 사람이다. 물론 소개팅에서와같이 이성으로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도 우리는 단지 좋은 사람으로 타자화한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옆에 두어도 딱히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음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 좋은 사람 입장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 스스로 쓸모 있음을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을 안다. 그래서 좋은 사람보다 구체적인 바보, “착한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남의 시선에 나를 담아 타인에게 맞추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수시로 변하는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 느낌과 쾌감을 쫓다 보면 어느새, 내가 바라는 나는 사라지고 타인이 바라는 나만 남게 되어 대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할 수도 있다.


결국, 내 안에 좋은 사람의 모습은 “나에게 나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편적으로 좋은 사람은 찾을 수는 있어도 내가 바라는 좋은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내 안의 좋은 사람을 객관화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작부터 주관적인 바로 나였으니까.


동생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좋은 사람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나에게 좋은 사람인 나를 찾게 되면 대상이 없어도 혼자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덤으로 터득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게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동생은 그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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