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집 평택을 다녀오다...

Miscellaneous/Story 2007. 3. 12. 02:02
오랜만에 평택을 다녀왔다.
전날 가족회의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토요일 저녁에 내려가려고 한 것이 하던 일을 마무리 하다 보니 아침이 되어서야 차를 몰고 평택으로 내려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가끔 평택을 내려가면 공기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서울에서 평택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평택의 공기는 서울과는 다르다.

잠을 못자고 내려간 터라 들어가서 노트북을 켜놓고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조카 태규의 목소리에 시끄러워 잠에서 깨어보니 청주에서 어머니와 누나 조카들이 집에 와있었다. 고향 집은 평택이지만 어머니는 청주에서 일을 하시고 누나는 결혼 후 청주에서 살다 보니 우리 가족의 제 2의 고향은 청주가 되었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1년 사이에 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듯하다. 평생 농사를 지시고 무모한 사업보다 안정적인 농사일을 평생 하시고 사셨는데 이제 건강상의 이유로 내년부터는 모든 농사를 하지 않으실 듯 싶다.

여럿을 때는 부모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농사 일을 도와드렸는데 머리가 크고 내 생활들이 늘어나면서 반항을 했던 나였다. 지금은 그 때의 내 행동에 많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나의 성장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과도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여럿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모님 싸우는 소리에 우울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서로 싸우고 힘들어 하면서 왜 같이 사시는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정이 많으시고 말 수가 없으시며 무모한 일을 벌리지 않으신다. 그런 반면 어머니는 외향적이시고 말이 많으시며 확신이 서는 일에 대해서는 추진하는 성격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데, 난 그때 마나 조금은 어머니 편에 서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항상 크게 싸우는 날은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신 날이었고 싸우는 내용을 들어보면 시시콜콜 어머니의 말이 옳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무엇 때문에 싸우셨는지 어떻게 타협을 보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두 분의 성격으로 인해서 아버지는 평생을 농사일을 하시며 사셨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난전 장사도 하시고 돼지와 같은 가축을 키우시기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때라 어머니는 니어카를 가지고 시내(집에서 시내까지는 걸어서 40분정도의 거리었다)에 가서 음식점에서 버리는 짬들을 모아서 돼지를 키우시기도 했다. 한 여름에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주겠다며 뚝에 가서 어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던 기억이다.

내가 어릴 때는 어머니가 상당히 엄하셨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쉬운 것 없이 사셨던 어머니였는데 옛날에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도 할아버지의 반대로 인하여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항상 가지고 사셨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다른 남아들보다 공부를 잘 하셨다고 한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나 자식으로서 믿는다 ^^)

그래서 그러셨는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까지만 해도 방학이 되면 항상 아랫목에 이불을 놓고 식구들이 뺑 둘러 앉아서 책을 보거나 어머니가 정해놓은 분량까지 문제집을 풀거나 수판을 놓고 어머니가 불러주시는 숫자를 더하고 곱하는 일상 속에 살았다.

성적이 떨어지면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는데 어느날은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어느 집에서 불이 난 것이다. 소방차가 와서 불을 끄고 있는 것을 구경하다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었다. 어머니는 문제집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셨고 들어오자마자 늦게 온 나를 혼내시기 시작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께서 풀어놓으라는 문제집이 있었는데 그 문제집의 답안을 보고 머리를 써가며 중간중간 틀린 답을 넣기도 하며 베껴놓았던 것이다. 답안 중에 답이 길어 “생략” 이라고 되어 있는 답까지 그대로 베껴놓았던 터였다. 이를 어머니가 눈치 채셨고 그 문제로 단단히 혼내시려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날 하필 동네에 불난리가 날게 뭐람…쿠쿠 그래도 불 구경은 재미났던 기억이다.

이렇게 어머니는 공부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하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에 손을 놓으셨던 것 같다. 어느날 학교에서 우수상을 받고 어머니에게 칭찬 받을 생각에 날듯이 좋아하며 집으로 달려왔는데 어머니는 일을 나가시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셨는지 내가 보여드리는 상장을 보시고도 별로 칭찬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때 만약 어머니께서 많은 칭찬을 하셨다면 그 칭찬의 힘은 지금의 나 보다 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회사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

아버지는 공주 출신으로 말수가 없으시고 말이 느리신 전형적인 농부시다. 우리집의 일보다 이웃들의 일들을 먼저 챙겨주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셔도 큰 노여움 없이 궁글게 살아오셨다. 농사라는 것이 바쁠 때는 한 없이 바쁘지만 일이 없을 때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일을 하실 때면 술 기운에 일을 하셨고 그러다 보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신 듯 싶다.

저녁쯤에 누나와 조카들 그리고 어머니는 청주로 내려가셨고 집에는 형과 나, 그리고 아버지만 남게 되었는데 우리집 남자들은 말수가 없어서 같은 지붕 아래에 생활하고 있어도 하루에 몇 마디도 하기가 힘들다.

저녁을 먹고 서울로 올라간다며 아버지와 형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와서 차에 시동을 켜고 앉아 있는데 불이 켜진 거실 창문에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말 한마디 사는 이야기 하지 못하는 과묵한 내가 불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안 좋아 지시면서 더욱 쓸쓸해 보이시는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 한번 나누지 못하고 다시 올라가는 것이 많이 죄송스러웠다…

이제는 혼자 생활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오래도록 떨어져 있어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 마저 잊고 사는 것 같다. 앞으로는 좀더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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