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그리고 좋은 사람.

Photography/Space 2015. 3. 29. 14:00

오늘의 여행은 속초다. 누군가 나에게 동서남북을 두고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래도 “동”을 택하겠다. 동쪽의 길 위에는 환희의 설렘이 있다. 동쪽 땅 끝나는 지점에서 느끼게 되는 그 환희를, 나는 언제나 동경한다. 


오늘은 아는 동생이 속초에서 나와 동행해 주었다. 동생과 이야기하다가 좋은 사람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나는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기억이 없다. 문득, 내 안에서 정의한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을지 궁금하다. 좋은 사람의 모습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이어서 그 의미 자체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상대방이 이해하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일도 벌어지고, 대화를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의 정의를 미리 합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생긴다.


착하거나 선한 사람을 우리는 흔히 “좋은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목적에 의해 스스로 손해를 자초하는 부류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측면에서는 정신적·사회적으로 강인한 사람이다. 물론 소개팅에서와같이 이성으로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도 우리는 단지 좋은 사람으로 타자화한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옆에 두어도 딱히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음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 좋은 사람 입장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 스스로 쓸모 있음을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을 안다. 그래서 좋은 사람보다 구체적인 바보, “착한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남의 시선에 나를 담아 타인에게 맞추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수시로 변하는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 느낌과 쾌감을 쫓다 보면 어느새, 내가 바라는 나는 사라지고 타인이 바라는 나만 남게 되어 대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할 수도 있다.


결국, 내 안에 좋은 사람의 모습은 “나에게 나는 좋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내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편적으로 좋은 사람은 찾을 수는 있어도 내가 바라는 좋은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내 안의 좋은 사람을 객관화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작부터 주관적인 바로 나였으니까.


동생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좋은 사람은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나에게 좋은 사람인 나를 찾게 되면 대상이 없어도 혼자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덤으로 터득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게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동생은 그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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