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시간.

Photography/Bicycle 2015. 4. 12. 16:30

나는 요즘 생활 속에서 더 많은 느낌을 사유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전거를 탈 때도, 새벽에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날 때도, 하다못해 장을 보는 시간마저도 나는 꿈을 꾼다. 필요한 만큼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엇을 향해 나는 숨을 쉬고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의 꿈은 누구도 훔쳐볼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나에게 무한한 안도감을 주는 숨겨진 공간이자 살아남을 시간이다. 때로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슬픔보다는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라서 나의 외로움은 슬픔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 슬픔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내 옆, 빈자의 몫이다.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차이만큼,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이다. 나는 누군가와 다르고 그들은 또 그들의 누군가와 다르게 살아간다. 무엇이 정답이라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과 다른 궤도에 진입한 사람을 보면, 다른 행성 사람인 양 철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내가 안인가 그들이 밖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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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기지 않은 렌즈

Photography/Bicycle 2015. 4. 8. 18:00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삶은 곧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음산하고 서글프다. 그러나 기다림은 아직 희망이 있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나는 자전거를 탈 때면 항상 카메라를 가져간다. 마음이 가는 사진 한 장 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렌즈 하나 더 챙기지 못한 나를 탓한다. 좋은 프레임, 그에 걸맞은 빛이 내리는 순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사진에 담으려는 마음과 조금만 더 가면 이보다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실랑이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주 겪는 일이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를 스쳤던가. 되돌아보면 후회스러운 장면, 지나치면 잊힐 줄 알았던 일들이 잔상으로 남아 아쉬움을 준다. “그래 조금만 더 가보자. 태양이 대지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꼭 그 따뜻함을 담을 수 있을 거야” 인생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스름이 짙어오는 황혼녘이 아니면 인생이 그러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것 또한 우리네 인생이다. 어느 날 사진을 현상하고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다며 누군가 옆에서 속삭인다면, 적어도 챙기지 않은 렌즈 때문에 뒤늦은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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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 본질

Photography/Bicycle 2015. 4. 4. 16:30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부엌 아궁이 모서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고 엄마는 내 옆에서 밥을 퍼담고 계셨다. 나는 문득 궁금증이 발동하여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른이 되면 이름 바꾸는 거예요?”

”아니 왜?”

“아니 어른 이름은 어른 같고요, 애들 이름은 애들 같아서요”

“^^ 그렇지 않아, 그냥 태어날 때 지어준 이름 그대로 어른이 되는 거야. 네 이름도 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도 똑같이 쓰는 거야”

“…”


난 더는 엄마와 대화를 잇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계속 의문만 맴돌았다. 정말 어른 이름은 어른 같고 애들 이름은 애들 같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이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와 같이 현상과의 분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파편화된 어릴 적 기억이지만 그때의 질문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어떤 경우엔 대다수 사람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것을 비판적 시각 또는 비관적인 사람으로 오인할 수 있어도 그러한 용기는 진보적 가치와 맞물려 이 사회를 발전시킨 동력 중에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에게 비관적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비꽈서 생각하는 버릇 때문이다. 그 버릇을 통해 나온 내용은 비관적일 때도 있고 낙관적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나의 비관적인 발언을 더 많이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간혹 억울하기도 하지만 핑계를 대거나 해명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나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구체적인 기억도 없어서 이런 생각 자체가 귀찮음을 숨기는 핑계일 수도 있다.


도자기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가마에 들어가기 전부터 정해놓지 않는다.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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