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장기.

Photography/Memorials 2015. 10. 6. 03:30



어렸을 때 어느 날, 친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심장, 장기, 신체의 모든 부분은 분명히 내 것인데 평소에는 그게 정말 내 몸 안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신기하지 않아?, 너도 다 가지고 있는데 못 느끼잖아. 그치? 신기하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누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막연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 비단 장기뿐일까. 그때보다 지금의 내가 나아진 것은 뭘까. 나이를 처먹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그냥 그렇게 남들보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속으로 되뇌고 있는 모습이 스스로 가증스러울 때가 있다. 그때는 몰라서 행복했고 지금은 알아서 행복한지를 스스로 묻고 있는 걸까. 이게 발전이라고 믿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물리적으로 변화가 없는 공간에서 자각할 수 있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가끔은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며 엿 같은 세상 잘 못 만나 제대로 개고생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내 마음 같지 않은 인간관계로 힘들어할 때는 제발 내 이야기 들어달라며 입을 틀어막고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낯선 곳으로 떠나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 욕망에게 도움을 받아, 멱살을 잡고 나를 집 밖으로 끄집어낸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어때 좋아? 괜찮아?”라고 항상 나에게 물어보지만, 대답은 언제나 “잘 모르겠어, 그냥 좋은 거 같아!” 라는 무책임한 답변 뿐이다. 누구는 이런 나를 남에게 손 내밀지 못하고 혼자 이 세상 모든 행복을 찾고 있다며 치기 어린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나 자신만으로 만족하고, 오로지 나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였을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삶은 “너무 남들처럼 살지 말자”가 최선인지도 모르겠다.


의식하지 못하는 신기한 장기처럼, 내가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남들로 인하여 영향을 받고 있다면 의식적으로 후회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후회스러운 삶으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살다 살다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인간임을 증명하다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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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의 부재(不在).

Photography/Snapshot 2015. 4. 1. 17:30

말할 수 없는 사물이 가끔 대화를 거부할 때가 있다. 내가 사물을 통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망각하는 어느 시점에 휘몰아치는 경험이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따금 이런 경험을 한다. 물론 그 경험 자체는 원천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별반 다르지 않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바로 반응의 부재인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용기, 그것은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요구에 대한 거절과 존재에 대한 거부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더욱이 그것을 잘 분리하여 본인의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거절을 세련되게 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서로 불편한 관계로 치닫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회피하거나 내민 손을 외면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이 상대방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서운함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섰다는 이유만으로 필요 이상의 가혹한 고통이 따르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남에게 먼저 다가서는 용기 보다도 다가온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본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응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라면"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오로지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에서도 선택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예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에 가깝다. 지금 당신 앞에 받아들일 수 없도록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세련되게, 멋지게 거절하자. 그 고뇌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닌, 내 안의 윤리적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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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같지 않아.

Photography/Memorials 2015. 3. 14. 01:23

들이는 공간만큼을 포기하는 것, 그것은 나에게는 큰 비용이다. 이 녀석은 방 안에 들이는 물건이 그저 흥미로움이겠지만 그만큼의 공간을 내줘야 하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며칠 전, 고양이 풀을 사다 키웠다. 방 안이 척박해 보이기도 하고, 이 녀석 반응도 궁금했다. 며칠 동안 설명서에 적힌 대로 나름의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이 녀석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냄새를 맡아 보라며 코앞까지 갔다 줘도 딴청이다. 다른 고양이는 이를 쑤시고 씹어 먹기도 하던데...



사람 관계도 가끔은 이렇게 엇박자다. 내 맘 같지 않을 때가 많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 생각과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세상에는 그런 묘약은 없다. 약간의 비용이 들더라도 속 시원히 이야기하고 스스로 그 결과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이야기도 전하지 못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에 미안하기도 하고, 다음 수습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서로의 마음도 애처롭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자연히 치유될 일이다. 그러나 내 잘못을 곱씹다 보면 그 시간은 참 더디기만 하다. 


허전해도 어쩌랴, 없어서 힘들고, 있어도 외로운 것이 인간인걸....

거칠고 차가워진 한쪽 면을 매일 같이 용접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공간만 작아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배움이고 인생이라며 간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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